우리 독자 기술로 만든 누리호가 2021년 10월 21일 오후 5시 우리 국민들의 희망과 기대를 안고 날아올랐다. 자체기술로 제작한 75톤급 엔진 4개를 묶어 마치 한 개의 엔진처럼 작동하도록 클러스터링(Clustering)된 1단 로켓은 순조롭게 점화돼 시원하게 화염을 뿜어냈다.
2010년 3월 개발이 시작된 누리호는 3단 액체로켓으로 1단은 75톤 액체엔진 4개, 2단은 75톤 액체엔진 1개, 3단은 7톤급 액체엔진으로 구성돼 있다. 누리호는 1.5톤급 위성을 지구 저궤도(600km ~800km)에 쏘아 올릴 수 있도록 개발됐다.
우리의 기대를 아는 듯 누리호는 발사 후 모든 절차를 잘 수행했다. 발사 127초 후 고도 59km에서 1단 추진체가 분리됐으며, 발사 233초 후에 고도 191km 지점에서 누리호에 실린 위성모사체를 보호하는 덮개인 페어링이 분리됐다.
2단 로켓 분리 후 발사 15분 후에는 목포 고도 700km 지점까지 상승해 1.5톤의 위성모사체 분리에도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3단 로켓의 연소 시간이 부족해 궤도 유지에 필요한 속도인 초속 7.5km에 이르지 못해 궤도 안착에는 실패했다. 위성 모사체를 목표 궤도인 700㎞에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초속 7.5㎞의 속도가 필요한데, 실제로는 초속 6.7~6.8㎞의 속도밖에 내지 못해 궤도에 안착하지 못했다.
속도가 부족하면 위성모사체를 우주로 밀어내는 원심력보다 위성모사체를 지구로 당기는 중력이 더 커져 지구로 떨어지게 된다. 결국 위성모사체는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호주 남쪽 태평양 앞바다로 포물선 운동을 하며 자유낙하했다.
누리호는 위성모사체가 궤도 안착에는 실패했지만, 발사 후 모든 절차를 완수해 문재인 대통령의 표현대로 ‘미완의 성공’으로 평가됐다. 1톤 이상의 위성을 자국 로켓으로 지구궤도에 올릴 수 있는 나라는 러시아,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과 인도 6개국뿐이다.
대한민국은 이번 누리호 발사로 7번째 우주 강국으로 자림 매김하게 됐다. 내년 5월 19일 예정된 누리호 2차 발사는 미완의 성공이 아니라 위성모사체를 궤도에 올리는 데 완벽히 성공해 코로나로 힘든 우리 국민들에게 우주 개발의 희망을 심어 주기를 기대한다.
2차 세계대전 말 독일 로켓 과학자 쟁탈전
누리호 개발에 참여한 연구원들은 이 날 누리호 발사를 보며 울컥했을 것이다. 10년 이상 로켓 개발에 매진해 온 연구원들은 하늘 넘어 우주를 향하는 꿈을 꾸며 로켓 개발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이겨냈을 것이다.
앞서 같은 꿈을 꾼 우주개발 선구자가 있었다. 주인공은 1912년 독일에서 태어난 ‘폰 브라운’이다. 폰 브라운은 아마추어 천문가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 ‘15소년 표류기’의 작가 쥘 베른의 ‘달나라 여행’ 읽고 우주를 향한 꿈을 키웠다. 청소년기에는 헤르만 오르베트의 ‘행성공간으로의 로켓’을 읽고 크게 감명 받아 우주를 개척하는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꿈은 1942년 세계최초의 로켓 V-2의 개발로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세계 최초의 로켓인 V-2는 반쯤 우주로 향하다 지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1944년 9월 8일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서 발사된 V-2로켓은 320km를 6분만에 날아 런던 시내를 폭격했다. 2차 대전 말기 연합국에 밀리던 독일 나찌가 전세를 뒤집을 신무기로 V-2 로켓을 사용한 것이다.
이 로켓은 독일어 보복(Vergeltung)의 첫 알파벳인 V를 사용하여 V-2, 즉 두번째 보복 무기로 명명됐다. 2차 대전 종전까지 V-2 로켓 약 1200 여발이 런던 폭격에 사용됐다. 전쟁이 낳은 대표적인 오버테크날러지(Over-Technology)로 한 세대 이상 시대를 앞선 무기인 V-2는 당시 어떤 방어수단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독일군을 런던에서 멀리 밀어내 V-2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당시 맨해턴 프로젝트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던 미국과 핵무기 개발을 막 시작한 소련은 핵무기와 V-2 로켓이 결합하면 가공할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1945년 독일로 진격하던 미군과 소련군의 첫번째 목표는 히틀러와 베를린이었지만, 두번째 목표는 독일 로켓 과학자였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통해 독일의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피네문데 로켓연구소에 접근할 때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과학자 100여명은 소련군을 피해 베를린 서남쪽의 V-2 공장으로 은신했다.
패전을 직감한 폰 브라운은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 날인 1945년 5월 2일 오스트리아 산악 지대에서 그의 동료들과 함께 V-2 도면을 가지고 미국에 투항했다. 폰 브라운을 놓친 소련은 독일의 기술을 흡수할 수 있는 팀을 꾸렸다. 팀 책임자는 폰 브라운과 같은 꿈을 가진 소련의 최고 로켓 전문가인 세르게이 코롤료프였다.
그는 피네문데 로켓 연구소에 남아 있던 모든 자료, 시설, 부품과 5000여명의 로켓 엔지니어들을 열차 수백대를 동원해 모스크바로 이송시켰다.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이를 바탕으로 V-2 로켓 도면을 2년에 걸쳐 새로 작성했다. 수차례 발사 실패를 거듭하다 1947년에 복제한 V-2 로켓 발사를 성공시켰다.
스푸트니크 쇼크와 두 천재의 등판
2차 대전 당시 바다 건너 독일과 일본을 상대한 미국은 해군·공군력이 소련보다 월등히 우세했다. 자국 영토와 동유럽에서 독일군을 상대한 소련군은 해군과 공군보다는 강력한 육군이 더 필요했다. 냉전이 심화되던 1950년대 초 미군을 상대로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할 수 없던 소련은 언제든지 미국의 핵폭격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1945년 핵무기 개발을 완료한 미국은 B-29 폭격기를 날려 핵폭탄을 실제로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해 가공할 위력을 선보였다. 반대로 소련은 미공군과 해군을 뿌리치고, 미 본토에 핵폭탄을 투하할 능력이 없었다. 소련은 미국 본토에 핵폭탄을 투사할 능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에 소련은 코롤료프에게 1톤 이상의 핵무기를 실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로켓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이에 반해 공군력이 월등히 우세하고 세계최고 로켓 전문가인 폰 브라운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은 로켓 개발에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소련 당국의 지시를 받은 코롤료프는 V-2 로켓을 개량해 R-1, R-2 로켓을 만들었고, 1953년에는 사정거리 1200km의 R-5 로켓 개발에 성공했다. 1957년 8월에는 R-7 로켓 발사에도 성공했다. R-7은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Inter-Continent Ballistic Missile)로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돼 6000km를 날아 극동의 캄차카 반도에 있던 표적을 명중시켰다. 코롤료프는 R-7의 추진 로켓을 사용해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코롤료프는 체재 선전을 위해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올려야 하고 인공위성은 군사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소련 당국을 설득했다.
결국 1957년 10월 4일 R-7 로켓을 사용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지구 궤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중량 83.6kg의 스푸트니크는 시속 3만km의 속도로 지구를 96분마다 한 바퀴씩 돌면서 하루에 15번씩 미국 하늘을 통과했다. 같은해 11월 4일에는 ‘라이카’라는 개를 실은 스푸트니크 2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라이카’는 우주로 간 최초의 지구 생명체로 기록됐다.
코롤료프는 계속해서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를 개발해 1961년 4월 12일에는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시켰고, 조종사인 유리 가가린은 최초의 우주인이 됐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미국인에게는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다. 미국인에게 ‘스푸트니크 쇼크’가 발생한 것이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최고라고 자부하던 미국이 우주개발에서 소련에 뒤쳐진 것은 충격이었고, 1953년 소련이 개발한 수소폭탄이 R-7 ICBM에 실려 언제든지 미국 본토로 날아올 수 있다는 것은 공포였다. 코롤료프가 개발한 R-7 로켓은 ‘소유즈’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우주활동의 주력 로켓으로 현재도 사용중이다.
자극을 받은 미국은 1957년 12월 6일 미 해군이 개발한 뱅가드 로켓으로 인공위성 발사를 시도했지만, 이 로켓은 발사 3초 후 발사대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폭발해 미국인들을 엄청난 좌절에 빠뜨렸다. 우주개발에 분발이 필요한 때였다. 이에 미국은 육군, 해군, 공군이 따로 추진하던 로켓 개발 사업을 국가적인 역량을 모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58년 7월 29일 NASA(미국항공우주국,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를 창설했다. 이후 미국은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무제한 예산과 인력을 퍼부었고, 독일 출신으로 2선으로 밀려나 강의나 하고 있던 폰 브라운을 등판시켰다.
1960년 폰 브라운을 NASA의 마셜 우주비행센터의 소장으로 임명해 우주 로켓을 개발에 전념케 한 것이다. 미 정치권은 폰 브라운에게 우주 개발에서 소련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어릴 적 ‘달나라 여행’을 읽고 우주를 향한 꿈을 키워 온 폰 브라운은 평생의 꿈을 실현시킬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우주 개발의 최종 목표로 인간을 달에 보냈다 성공적으로 귀환시키는 유인 달 탐사를 제시했다. 시기는 1967년에서 1968년 사이로 못박았다.
미 정치권은 폰 브라운의 제안을 받아드렸고,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의회연설에서 10년 안에 달에 갔다 오겠다는 연설을 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1962년 9월 케네디 대통령은 텍사스 주 휴스턴에 위치한 라이스대학에서 그 유명한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연설을 통해 “60년대가 가기 전 달에 사람을 보낼 것”이라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미 정치권과 NASA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폰 브라운은 누리호와 같은 3단 로켓인 Saturn-V 를 만들어 아폴로 계획에 사용했다. Saturn V의 1단 로켓은 F-1 엔진 5개를 클러스터링 해 무려 3460톤의 출력을 발생시키는 현재까지 인류가 개발한 단일 로켓 중 가장 큰 출력을 가진 로켓이다. Saturn-V의 1단 로켓은 누리호 1단 로켓보다 11배 이상의 출력을 가지고 있었다. 폰 브라운과 NASA의 노력은 1969년 7월 16일 플로리다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아폴로 11호로 결실을 맺는다. 사령선과 달 착륙선으로 이뤄진 아폴로 11호는 Saturn-V 로컷에 의해 발사돼 4일 후인 7월 20일 달에 착륙했다. 아폴로 11호에 탑승한 닐 알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지구인 최초의 발자국을 달에 찍었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에서 승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 미국은 아폴로 프로젝트로 사고가 발생한 아폴로 13호를 제외하고 아폴로 11호부터 아폴로 17호까지 총 6번 달 착륙에 성공했다. 달에 발을 디딘 우주인은 12명에 달했다. 이후 누구도 달에 간 사람은 없었다.
2번째 유인 달탐사 프로젝트 참여...독자 달 착륙선도 보낸다
우리나라는 미국이 주축이 돼 추진중인 2번째 유인 달탐사 프로젝트인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올해 5월 우리나라는 아르테미스 약정에 서명해 세계 10번째의 아르테미스 프로젝트 참여국이 됐다. 이 프로젝트는 2024년 남녀 우주인 1명씩을 달에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2028년까지 달에 지속가능한 유인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중이다.
우리나라는 독자적인 달 탐사 프로젝트도 진행중이다. 2022년 8월 미국 스페이스 X사의 팰컨 9을 이용해 달 궤도선(KPLO, Korea Pathfinder Lunar Orbirer)을 달에 보낼 계획이다. 우리의 달 궤도선은 달 상공 100km의 고도에서 1년간 달 탐사를 수행할 예정이다. 우리 달 궤도선은 NASA에서 개발한 ShadowCam으로 얼음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달 극지역을 촬영해 아르테미스 프로젝트도 지원한다.
2030년에는 한국형발사체를 이용해 달 착륙선을 달에 직접 보내는 프로젝트도 추진중이다. 대한민국 달 착륙선이 달 착륙에 성공해 우리 국민 모두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그 순간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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