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자사주 소각 의무화 기조가 본격화되면서 상장사들이 교환사채(EB)를 통해 자사주를 유동화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일각에선 자사주 소각이 주주환원 강화라는 정책의 취지를 왜곡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11일 국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김남근 의원(정무위원회 소속)은 지난 10일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상장사가 자사주를 신규 취득할 경우 1년 이내 소각을 의무화하고, 기존 보유 자사주도 같은 규제를 적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예외 조항도 뒀다. 스톡옵션 지급, 근로복지기본법상 우리사주조합 출연, 공모 전환사채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권리 행사 등은 자사주 보유가 가능하다.

이 경우에도 매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자사주 보유 목적과 처분 계획을 승인받아야 하며, 승인받지 못하면 소각해야 한다. 아울러 주총 의결 과정에서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은 의결권을 3% 이상 행사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그래픽=챗GPT]

정책 추진이 가시화되자 상장사들은 자사주를 기초자산으로 활용한 EB 발행에 나서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EB 발행 공시는 총 11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크게 늘었다. 발행 기업은 태광산업, SK이노베이션, 네온테크, 모나용평, 엘앤씨바이오, KG에코솔루션, 바른손 등이다.

EB는 발행사가 보유한 자사주를 담보로 삼아 투자자에게 일정 기간 내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사채다. 만기까지 주식 전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원금을 상환한다.

자사주를 직접 소각하지 않으면서도 EB를 통해 우호세력에게 지분을 넘기거나 자금 조달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자사주를 우호세력에게 넘기는 방식도 가시화되고 있다. LS는 지난달 초 자사주 약 1.2%(약 650억원)를 대한항공에 EB로 발행했으며, 롯데지주는 자사주 약 5%(약 1450억원어치)를 그룹 계열사인 롯데물산에 매각했다.

재계 관계자는 "상법 개정이 가시화되자 기업들이 자사주를 EB로 활용하거나 계열사에 넘기는 방식으로 선제 대응하고 있다"며 "자사주는 활용 방식에 따라 경영권 방어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주주가치 제고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은 이러한 행태가 정책의 본래 취지를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참여연대·금융정의연대·경제민주화시민연대는 공동 논평을 통해 "태광산업의 자사주 EB 발행은 주주가치 훼손이자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비상식적 시도"라며 "정부의 상법 개정 기조를 회피하려는 꼼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