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잘 부탁드립니다", "소송 남발 아니에요"
12일 자본시장연구원과 한국증권학회가 공동 개최한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지배구조' 세미나가 여의도 금투센터에서 열렸다.
상법 개정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의지가 최근 확인된다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까지 참석하면서 취재진과 관계자들로 행사장은 붐볐다.
이날 첫 번째 주제 발표자로 나선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100여명의 취재진과 일일이 인사를 하고 명함을 교환했다.
준비해 온 명함이 떨어지자 쉬는 시간 어디선가 다시 명함 뭉치를 들고 나타나 기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면서 "소송 남발 아닙니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상법 개정과 관련해 최근 경재매체를 중심으로 쏟아진 부정적 기사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최근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재계를 중심으로 반대 의견도 강도를 높이고 있다.
재계 논리는 이렇다.
이사회는 회사에 대해 선관주의의무 내지 충실의무를 진다. 이 의무를 져버리고 회사에 손해를 끼칠 경우 배임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만약 이사회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까지 포함할 경우 이사회가 주주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영적 의사결정을 할 경우 역시 배임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민사상 책임까지 진다.
이사회는 일일이 주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경영활동은 마비된다. 소송이 난무할테니 이사회 구성조차 어려워진다.
김춘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본부장은 "주주간 이익이 충돌할 때 의사결정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라며 "소가 제기될 수밖에 없고 이 의무위배는 민사상 소송 뿐 아니라 형사상 배임까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상법 개정을 찬성하는 전문가들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고 지적한다. 김 교수의 말을 따라가 보자.
김 교수는 상법 개정의 기본방향은 지배주주와 일반주주간 이해가 충돌하는 거래에 대해서만 이사회에 책임을 묻는 것이지, 회사의 이익과 일반주주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는 문제의 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예컨대 어떤 주주가 회사에 배당을 제안하고 이사회가 투자 재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배당을 거절해도 이사회는 의무를 져버린 것이 아니다.
이사회는 주주의 비례적 이익이 훼손되는가만 살피면 되지, 각각의 주주에게 개별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주발행도 마찬가지다. 회사의 재무구조가 개선되므로 회사에는 이익이 되지만 기존 주주는 지분율이 희석되므로 불이익을 받는다.
하지만 모든 주주가 똑같은 손해를 입고 특정 주주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므로 민형사상 책임이 성립할 여지가 없다.
김 교수는 "주주간 이해충돌이 없는 자본배분, 신규투자 등 경영전략적 의사결정에 대해서는 오히려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정해, 선관주의 의무만 충족한다면 투자 실패에 대한 면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상법 개정이 한국 자본시장 정상화를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수 십 년 간 공정거래위원회를 중심으로 기업 지배주주의 사익편취 활동을 규제하고 처벌하기 위한 노력이 단행됐지만, 기업들은 늘 새로운 방식을 동원해 오너가의 이익을 도모했다. 그 결과가 주주간 불공정한 부의 이전이다.
삼성물산 합병, LG에너지솔루션 분할상장, SK바이오사이언스 분할 상장, 현대백화점과 현대그린푸드의 인적분할 등이 모두 일반주주의 이익이 침해된 예다.
김 교수는 "공법적 규제를 통한 (규정중심) 접근 방식은 규제 회피를 통해 한계에 직면했다"며 "민사적 방법에 의한 원칙중심 통제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중혁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올해로 고대 경영학과 교수 20년째인데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토론회에서 지배구조 문제가 이슈로 제기됐다"며 "이제는 해결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변준호 안다자산운용 인게이지먼트본부 대표는 "외국계 LP들과 얘기해 보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마지막 기회로 이번에 (밸류업에) 실패하면 엑시트를 심각히 고려하겠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은 "20년 동안 우리 법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거버넌스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며 "계열사 간 거래를 공정위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법이 면죄부만 주고 허수아비만 공격한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천 부회장은 "사익편취는 계속 발전 중이고 하나만 규제하면 계속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며 "자본시장에선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통상 이러한 정책 토론회는 발제가 끝나면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쉬는 시간을 이용해 자리를 뜨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2부 토론회가 계속되는 동안 많은 취재진과 관계자들이 자리를 지켰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상법 개정에 대한 개인 투자자의 관심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일까.
이복현 원장이 오는 26일에는 경제단체 측 인사들을 만나 다시 상법 개정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다고 한다. 균형감과 과감성으로 엉킨 실타래를 단숨에 끊어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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