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는 장수를 교체하지 않는다"
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이 지난해 12월 9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전원에 대해 연임을 결정하며 한 말이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신한금융그룹 계열사 14곳 중 12곳 사장의 임기가 올해 연말과 내년 초 만료된다. 최근 신한투자증권에서 발생한 1300억원 규모의 금융사고로 진옥동 회장이 내부통제에 역점을 둔 만큼, 계열사 사장들이 대거 물갈이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금융지주 자회사 최고경영자 후보추천위원회(자경위)는 지난 9월 10일부터 자회사 대표이사에 대한 승계절차를 진행 중이다. 최종 결과는 이달 초에서 중순께 발표될 전망이다.
이번 자경위의 CEO 인사 검증 대상에 이름을 올린 계열사 사장은 전체 계열사 14곳 중 올해 말에서 내년 초 임기가 만료되는 12곳의 사장이다.
업계 안팎에서는 신한투자증권발(發) 1300억원 손실 사태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사장이 교체될 것으로 내다본다.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며 9개 자회사 대표 전원을 연임했던 지난해와 달리, 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이 쇄신카드를 꺼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신한투자증권은 지난 8월2일부터 10월 10일까지 ETF LP 업무 목적과 무관한 장내 선물 매매로 1300억원 규모의 손실을 냈다.
지난 8월 미국발 경기침체 우려로 국내 증시가 폭락하며 손실이 커지자, 이를 감추기 위해 허위 스왑거래를 등록하는 등의 행위도 이뤄진 것으로 파악된다. 거래를 진행한 상장지수펀드 유동성 공급 부서에서는 해당 사실을 숨겼으며, 회사는 두 달이 넘은 지난 10월 11일 선물거래 결산 과정에서야 이를 인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진옥동 회장은 지난 10월 주주서한을 통해 “다시 한번 내부통제를 되짚고 강화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달 말 임기 만료를 앞둔 계열사 사장은 정상혁 신한은행 사장, 문동권 신한카드 사장, 정운진 신한캐피탈 사장, 이영종 신한라이프 사장, 이희수 신한저축은행 사장, 김지욱 신한리츠운용 사장, 이동현 신한벤처투자 사장, 강병관 신한EZ손해보험 사장, 이승수 신한자산신탁 사장, 조경선 신한DS 사장, 정지호 신한펀드파트너스 사장이다. 그 외 박우혁 제주은행 사장도 내년 3월 21일 임기가 만료된다.
우수한 실적과 무사고를 이끈 정상혁 신한은행 사장과 이영종 신한라이프생명보험 사장은 연임이 유력하다.
정상혁 신한은행 사장은 지난해 2월 한용구 전 신한은행 사장의 잔여 임기를 이어받았다. 지난해 순이익 3조677억원를 기록해 ‘3조 클럽’ 자리를 보전했으며, 올 상반기 순이익 2조535억원으로 취임 1년 만에 ‘리딩뱅크’ 자리를 탈환했다.
신한라이프생명보험은 이영종 사장 취임 이후 기존 생명보험사 빅3 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우수한 성과를 기록했다. 이 사장의 임기 첫해인 2023년 별도 기준 당기순이익 4819억원을 기록하며, 업계 3위인 교보생명(4891억원)을 턱밑까지 추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 상반기 보험계약마진(CSM) 역시 7조원으로 이미 교보생명(6조1331억원)을 추월했다.
반면, 다른 계열사 사장들의 연임 여부는 불확실하다.
문동권 신한카드 사장은 취임 이후 업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하청업체 기술 탈취 의혹과 200억원 규모의 부실채권 문제를 안고 있다. 신한카드는 협력업체 에스와이폴라리스의 결제 관련 기술을 탈취했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이어 지난 10월에는 206억6200만원의 부실채권이 발생했다고 공시하기도 했다.
정운진 신한캐피탈 사장과 이승수 신한자산신탁 사장은 실적 하락과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로 교체설이 나온다.
정운진 신한캐피탈 사장은 지난 2021년 취임 이후 이미 2022년과 2023년 두 차례에 걸쳐 1년씩 연임한 인물이다. 올해 3분기 누적 당기순이익(1526억원)은 전년동기보다 47.9% 쪼그라들었으며, 올 6월 말 기준 부동산PF 비중이 기업대출로 분류된 브릿지론까지 더해 약 22%에 이르러 자산건전성이 악화됐다. 눈앞의 수익만을 노리다 리스크 관리에 실패했다는 평을 받는다.
신한자산신탁 역시 무분별한 부동산 투자로 부실채권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올해 6월 말 (충당금+자기자본)/요주의이하자산 비율은 122.1%로 2022년 말(1351.3%) 대비 크게 하락했다. 고정이하자산 비중도 67.5% 수준으로 높다. 이에 올 3분기 누적 1785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하며 적자전환했다.
강병관 신한EZ손해보험 사장도 교체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지난 2022년 출범 이후 한 번도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동현 신한벤처투자 사장은 투자실적이 좋지만 2020년 취임 이후 2023년과 2024년 두 차례 연임에 성공해 이미 4년간 대표직을 보냈다는 점에서 연임이 불투명하다고 점쳐진다.
신한지주 관계자는 “올해도 특이사항이 없는 이상 12월 중순쯤 결과가 나올 것 같다. 요즘 여러 가지 이슈가 있어 이를 반영한 후보를 최종적으로 하지 않을까 싶다”면서도 “다만, KB금융도 그렇고 항상 인사 관련 하마평과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에도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전 회장도 연임될 것이란 예상이 많았으나 진옥동 회장이 취임했다. 어떤 조직이든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게 인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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