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이후에도 사람들이 밸류업이란 말을 쓸까요?"
얼마 전 만난 자본시장 관계자의 말이다. 지난 수 개월간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꽤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이인지라 그의 비관적 전망이 다소 놀라웠다.
밸류업 프로그램의 포문을 연 것은 지난 1월 중순 윤석열 대통령이다.
소액주주와 대주주의 이해가 상충할 수 있다는 점을 윤 대통령은 지적했고 이후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밸류업 프로그램이 조금씩 구체화 됐다.
우리 기업들은 세계 13위의 한국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게 글로벌 주식시장에서 수십 년째 소외를 받아 왔다.
삼성전자 시총은 500조원으로 여전히 3년 전 수준이다. 반면 비슷한 매출을 기록 중인 TSMC는 850조원을 넘어섰다.
정부가 앞장서서 한국 증시가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면 이웃나라 일본과 대만이 그러했듯이 외국인 투자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코스피 지수는 1월 중순보다 10% 가까이 상승했다. 하지만 이 기간 재미를 본 개인투자자가 많지는 않을 성싶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코스피 시장에서 개인은 11조원 이상을 순매도 했다. 반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같은 기간 16조원 어치를 순매수하며 15년 만에 분기별 최대 순매수 기록을 세웠다.
개인들이 여전히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의구심을 놓지 못한 반면, 외국인은 더 이상 한국 정부가 양치기 소년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들어 외국인 투자자들과 빈번히 접촉을 했다는 한 금융 전문가는 "일본은 2014년 아베노믹스 이후 10년 이상 밸류업 프로그램을 꾸준하게 추진했다"며 "한국은 보다 다이나믹하기 때문에 더 빠르게 추진이 가능할 것이란 기대가 있다"고 전했다.
총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한국 정치판은 또 한 번 들썩일 듯싶다. 문제는 총선 이후 '밸류업'이며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또다시 유야무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최근 금융당국이 밸류업을 위한 여러 당근과 채찍을 선보이고 있지만, 과연 강제성이 없으면서도 사실상의 구속력이 있는 마법 같은 제도를 내놓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밸류업 프로그램의 성공 조건은 단언컨대 '지속가능성'이다. 기업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고 등떠밀려 주주환원 시늉을 낸 들, 다시 과거로 회귀할 퇴로가 마련돼 있다면 어떤 투자자도 이를 신뢰하지 못 할 것이다.
유난히 한국 기업에 대한 신뢰가 낮은 개인 투자자가 순매도 행렬에 동참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기업이 주주환원을 지속적으로 하도록 하려면 결국 정치권력과 관료가 사명감을 갖고 이를 꾸준히 압박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여건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여권 일부와 재계는 '밸류업=상속세 폐지'란 공식으로 단순화를 넘어 오히려 역주행을 모색하려 하고 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공약의 선점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했는지 딱히 언급이 없다. 그나마 이 사안에 지난 4년간 관심을 갖고 공을 들여온 이용우 민주당 의원은 경선에서 탈락해 22대 국회에서 볼 수 없게 됐다.
소액주주 플랫폼의 한 대표는 "제도 변화를 요청하기 위해 여러 의원실을 직접 찾아다녔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출마 준비하냐'라는 비아냥이었다"고 말했다.
여의도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관료도 움직이지 않음은 자명하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그나마 열의를 갖고 밸류업을 추진한다고 하는데 총선 이후 그의 행보도 불확실하다.
그나마 믿을 구석은 1400만명에 이르는 개인투자자다. 집권 여당이 총선 이후 밸류업을 팽개치거나, 혹은 반대로 거대 야당이 그 발목을 잡는다면 다음 선거에서는 분명한 대가를 치를 것임을 정치권이 유념했으면 싶다.
앞선 자본시장 관계자는 "밸류업을 그냥 뭉개기에는 개미들이 너무 많아졌고 또 똑똑해졌다"고 "믿을 구석은 그것 뿐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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