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시론] 은행의 주인은 누구인가

배당 늘리라면서 한편에선 넉넉한 충당금 요구
상생금융·소비자 과보호까지...주주는 뒷전으로
은행주 밸류업? 또 다시 '양치기 소년' 될까 우려

주주시론 승인 2024.03.20 16:19 | 최종 수정 2024.03.21 09:18 의견 0

은행은 이익이 발생하면 먼저 대손충당금을 쌓는다. 남은 금액이 은행의 순이익이 된다. 이에 근거해 세금을 내고 나머지 돈은 은행의 주인인 주주에게 배당으로 지급한다. 은행 경영의 기본 메커니즘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금융감독원은 은행들에게 내부 유보금을 많이 쌓을 것을 권고해 왔다. 외국인 주주 비중이 높은 시중은행이 배당을 많이 하면 자금은 외국으로 흘러 나가고 은행의 건전성이 위협받는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조금씩 다른 주장들이 힘을 얻고 있다. 은행이 내부에 유보한 자금의 투자수익률이 높지 않은 현실에서 불필요하게 자본을 늘리기보다는 차라리 배당으로 지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주총을 앞두고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 시중 금융지주를 상대로 행동주의 전략을 활발하게 펼치면서 이러한 주장에 조금씩 힘이 실렸다.

이런 가운데 올 초 윤석열 대통령이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을 통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강조하면서 은행의 배당 정책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란 기대가 생겼다. 금융주 가격도 그 덕에 모처럼 상승세를 보였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해 5월 9일(현지시간) '금융권 공동 싱가포르 IR'에서 해외 투자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금융감독원)

하지만 정작 은행권 관계자들은 곤혹스러워한다. 감독 당국의 입장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한쪽에선 배당을 지시하고 다른 한쪽에선 연체율 상승이나 건전성 악화에 대비해 충당금을 더 많이 쌓으라고 하기 때문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이복현 금감원장은 배당을 강조하는데 정작 국장을 만나면 '배당이 뭐냐, 충당금이나 제대로 쌓아라'라고 말하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배당과 충당금의 오래된 상충 관계에 더해 이제는 또 하나의 변수까지 더해졌다. 바로 상생이다.

지난해 10월 말 윤 대통령은 '종노릇'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하며 은행들의 고금리 '이자장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은행들은 부랴부랴 상생금융안을 갹출하겠다고 나섰다. 그게 최소 2조원 규모다.

이게 끝이 아니다. 금감원은 은행들에게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HSCEI) 주가연계증권(ELS) 분쟁조정기준안을 제시하고 자율배상을 권고했다.

해당 상품의 판매규모가 8조원으로 가장 큰 KB국민은행과 2조원 수준의 NH농협은행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주총을 앞두고 이사회는 숨을 죽인 채 눈치보기만 계속하고 있다.

투자는 자기책임의 원칙 하에서 이뤄지는 것이 기본인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금융상품 소비자의 투자 실패를 판매기관이 보상해 주는 게 일상이 됐다.

지난해에는 우리은행이 홍콩 빌딩에 투자한 부동산 펀드 고객돈을 물어줬다. 과연 은행돈이 본인 돈이면 금융지주 회장님들이 저렇게 펑펑 인심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국 은행은 벌어들인 수익으로 상생금융도 해야 되고 소비자 보상도 해야 된다. 남은 돈이 있으면 충당금을 쌓아야 하고 배당은 다시 한 번 뒷전이 된다. '밸류업 프로그램' 발표를 전후해 치솟던 은행주 주가는 다시 제자리인 이유일 것이다. 은행권 PBR은 0.5배에서 멈춰있다.

은행 이사회가 정치권과 감독당국, 소비자를 주주보다 우선시 한 결과다. 자신의 임기를 주주가 아닌 여의도가 결정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개인 투자자들은 정부가 내놓은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냉소적인데 반해 외국인들은 기대를 꽤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하지만 이번에도 다시 없던 일이 된다면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시장은 쳐다도 안 보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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