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부터 기업들의 교환사채(EB) 발행이 급증하고 있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담은 '3차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되기 전, 보유 중인 자사주를 경영진의 입맛에 맞게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런 가운데 제 3자 배정 교환사채 발행이 법원에 의해 사실상 허용되면서 일반 주주는 고스란히 지분이 희석되는 피해를 입고 있다.

상법 전문가들은 회사가 매입한 자사주는 이미 껍데기에 불과한데, 이를 다시 EB 발행을 통해 부활시키는 것은 주주가치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자사주는 회사가 쟁여둔 현금 보따리가 아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22일 서울 여의도 IFC에서 '자기주식 교환사채의 법적 쟁점 - 태광산업 케이스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45차 세미나를 개최했다.

발제자로 나선 송옥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영진이) 자기주식이라는 것을 회사가 현금화할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라고 많이들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는 그러면서 “하급심 판결들은 대부분 자사주 처분을 단순히 회사 자산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보지만, 이는 잘못된 이해”라며 “실제로는 신주 발행과 동일한 효과를 가지므로 주주의 이해관계가 똑같이 달라진다. 회사들도 이를 잘 알기에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자사주를 보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이남우 회장 역시 "회사 CEO나 심지어 CFO까지도 자사주를 재무상태표 좌측 상단에 현금 바로 아래에 있는 무슨 유동자산으로 생각을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회장은 그러면서 "자기주식은 회사가 사는 순간 없어지는 건데 아직도 우리 한국거래소는 시가총액에서 (매입한 자사주를) 차감을 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태광산업, 상법 개정 앞두고 자사주 활용한 EB 발행 나서

최근 태광산업은 교환사채(EB) 발행을 둘러싸고 트러스톤자산운용과 법정공방을 벌이고 있다.

교환사채는 회사가 발행하는 채권인데, 일정한 조건이 되면 회사가 보유 중인 자사주와 교환할 수 있다.

새로운 주식 발행이 없다는 이유로 기존 주주 지분이 희석되지 않는다는 것이 발행 회사의 입장이다.

특히 자사주를 직접 시장에 팔면 ‘자사주 매각’으로 주가에 부정적 신호를 줄 수 있는 반면 교환사채를 발행하면 당장 주식을 내다 파는 것이 아니라, 채권 형태로 자금을 조달하면서 점진적으로 자사주를 소진할 수 있다.

태광산업은 지난 6월 말 자사주 27만주를 담보로 3200억원 어치 교환사채 발행을 추진했다. 애경산업 인수를 위한 실탄 마련을 위해서다.

이에 태광산업 2대 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은 발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태광산업이 막대한 자사주를 불필요하게, 공정가치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에 처분해 주주에게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50부는 지난 10일 트러스톤이 제기한 자사주 기반 EB 발행 금지 가처분 2건을 모두 기각하며 “이번 발행은 주주가치 훼손이 아니라 정당한 자금조달 방식”이라고 판단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22일 서울 여의도 IFC에서 '자기주식 교환사채의 법적 쟁점'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사진=김선엽 기자]

◆ 전체주식의 25%를 제 3자에게 넘겨도...법원 "문제 없다"

송 교수는 이번 태광산업 사건이 주는 시사점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가처분 제도의 한계다. 그는 “가처분은 임시 처분의 성격이 강하고, 법원이 쉽게 개입하기 어렵다. 특히 고도의 소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주주들이 문제를 제기해도 인정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둘째는 절차적 정당성 문제다. 태광산업은 6월 27일 이사회에서 구체적인 안건을 정하지 않은 채 교환사채 발행을 결의했고, 가처분이 제기된 후인 7월 1일 급히 세부 사항을 보완했다.

송 교수는 “이사회가 처음부터 충분히 논의하지 않고 사후적으로 보완했다는 점에서 절차적 흠결 논란이 생겼다”며 “특히 발행 상대방조차 초기에 정하지 못한 점은 문제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셋째는 발행 규모의 문제다. 그는 “자사주 25%를 활용한 교환사채 발행은 발행 주식 총수의 4분의 1에 달한다”며 “이 정도 규모는 경영권 구조 자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결국 특정 주주의 이익을 위한 조치라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법원은 ‘의심만으로는 판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고 설명했다.

◆ 제 3자 유증과 마찬가지인데 반사적 이익?..."주식 안 판 주주는 뭔가"

천준범 변호사(와이즈포레스트 대표)도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지적했다. 천 변호사는 "제 3자 배정 교환사채 발행은 제 3자 배정 유상증자와 다를 것이 없다"며 "(자사주를 매입할 수 있는) 배당가능이익이 있기만 하면 이사회가 제 3자 배정을 통해 지분율을 결정할 수 있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그러면서 자사주를 회사의 자산으로 인식하는 법원의 '자산설'을 비판하고 '미발행주식설'을 적극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

특히 자사주 처분에 따른 지분율 변동을 사실적·경제적·반사적 이익으로 보는 판례의 오류를 짚었다. 천 변호사는 "보유 주식을 회사에 처분하는 의사표시를 한 주주는 돈을 선택한 것이고, 청약을 받았지만 안 판 주주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것은 완전히 묵시적·법적 의사표시"라며 "사측의 일방적 자사주 처분은 이런 주주의 법적 이익에 대해 보호가 이뤄지지 않는 결과를 빚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