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핵심으로 하는 국회의 3차 상법 개정이 임박했다. 더불어민주당은 3차 상법 개정안을 11월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킨다는 목표다.
12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자사주 소각 의무화 관련 법안이 다수 올라와 있는 상태다.
김현정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신규 자사주는 즉시 소각하도록 하고 있다. 기존에 보유한 자사주도 6개월 이내 소각을 원칙으로 한다. 같은당 민병덕 의원이 발의한 같은 법안은 자사주를 1년 이내 소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자사주 비율이 3% 미만일 경우에는 2년 소각하도록 했다.
김남근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도 기업이 취득한 자사주에 대해 원칙적으로 취득 후 1년 내 소각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김 의원은 예외적으로 자사주를 보유할 경우 주주총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대주주 의결권은 3%로 제한하는 내용을 개정안에 포함시켰다.
민주당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 관계자는 "신규 자사주 소각 의무화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기존 자사주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제"라며 "1년 정도 유예기간을 주는 등 대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때 자사주 규제 확 풀어
민주당은 자사주를 소각하면 시장에 유통되는 주식 수가 줄어 주당순이익(EPS)이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주가 상승과 주주가치 제고로 이어져 자본시장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될 것이란 판단이다. 해외에서처럼 '자사주 소각→주당순이익 상승→증권사 목표주가 상향→기업 주가 상승'이 공식처럼 나타날 것이란 기대다.
2011년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폐지된 이후 자사주가 대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돼 왔다는 인식도 있다. 국내 상법은 1962년 제정 당시 기업의 자사주 취득 자체를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주식 소각·합병 등 특별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매입을 허용했을 뿐이다. 취득한 자사주도 바로 소각하거나 1년 안에 처분하도록 의무화했다.
자사주 규제가 풀리기 시작한 건 1994년이다. 증권거래법(현 자본시장법) 개정을 시작으로 상장사에 한해 자사주 취득을 허용하도록 규제가 점차 완화됐다.
기업의 자사주 규제가 대폭 풀린 건 이명박 정부 때이다. 2011년 개정된 상법은 비상장상도 자사주 취득을 허용하고, 취득한 자사주의 처분 방법 등은 이사회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자본시장법의 적용을 받는 상장사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는 과정에서 삼성물산이 의결권 없는 자사주(전체 발행주식의 5.76%)를 제3자인 KCC에 매각해 의결권을 되살리고 우호 지분을 늘릴 수 있었던 것도 이명박 정부의 자사주 규제 완화 덕분이다.
▲미래에셋생명 자사주 비율 34.2%...롯데지주·티와이홀딩스·인베니 순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공개한 공시대상기업집단의 주식소유현황에 따르면 자사주가 있는 대기업집단은 79곳, 계열사는 414개사다. 이 중 자사주 취득·소각·처분 시 공시 의무가 있는 자사주 비율 5% 이상 상장사는 71곳이다.
자사주 비율이 가장 높은 상장사는 미래에셋생명보험으로, 전체 주식의 34.2%가 자사주다. 미래에셋그룹 계열사 중에는 미래에셋증권(자사주 비중 18.9%)도 자사주 비율이 높은 편이다.
미래에셋에 이어 롯데그룹의 롯데지주(32.3%), 태영그룹의 티와이홀딩스(29.2%), LS그룹의 인베니(28.7%), SK그룹의 SK(24.6%), 태광그룹의 태광산업(24.4%) 순으로 자사주 비율이 높았다. 이 중 태광산업은 지난 6월 자사주 기반으로 3200억원 규모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하기로 했다 소송에 휘말리는 등 논란을 빚었다.
주요그룹 계열사의 계열사 가운데 자사주 비율이 10%를 넘는 기업도 상당수다. 삼성그룹의 에스원(11%), 제일기획(12%), 삼성생명(10.2%), SK그룹의 SK네트웍스(12.4%), SKC(10%), 한화그룹의 한화생명(13.5%), HD현대그룹의 HD현대(10.5%), CJ그룹의 CJ대한통운(12.6%), 두산그룹의 두산(16.7%) 등이다.
최근 자사주를 기반으로 대규모 교환사채를 발행하려다 주주들의 반발에 부딪혀 포기한 KCC그룹은 KCC(172%)와 KCC건설(6.8%)이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자사주 소각 의무화..영국,독일도 주주가치 훼손 금지”
이재명 대통령도 3차 상법 개정에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말 미국 뉴욕증권거래소를 찾은 자리에서 “기업의 불합리한 의사결정 구조를 합리적으로 바꾸겠다”며 “3차 상법 개정에 저항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또 “외국인 투자자들의 한국 투자에 걸림돌로 작용했던 장애 요소를 다 바꾸겠다”고도 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고, 영국과 일본, 독일 등은 기업이 자사주를 거래할 때 대주주 경영권 방어 목적의 지분 매각 등으로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걸 원칙적으로 금지한다”고 밝혔다.
정부와 국회의 3차 상법 개정에 기업들은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다. 기업들은 자사주를 의무적으로 소각할 경우 경영권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 수 있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워 법 개정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또 기업의 자사주 취득 의지를 약화시켜 결국에는 주주가치 제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경제전문가는 “자사주를 언제든지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으로 간주해 온 기업들로서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최근 주주가치 훼손 논란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자사주를 활요한 EB발행에 나서는 것도 같은 이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