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횡령·배임으로 얼룩진 이화그룹...주식시장이 민생이다

강력한 내부통제시스템 필요성 커져
상폐 위기 이화그룹 상장 3사 소액주주 36만 명
거래소 기계적 행정처리와 대주주 정보격차로 문제 악화
사외이사 정보 제한돼 경영진 감시 어려워
소액주주 보호 방안 미비

김나경 승인 2024.04.23 15:57 | 최종 수정 2024.04.23 15:58 의견 2

지난해 5월 김영준 전 이화그룹 회장과 경영진의 수백억원대 횡령·배임 수사가 시작되며 이화그룹 상장 3사(이화전기·이아이디·이트론)가 상장폐지될 위기에 빠졌다. 한국거래소는 지난해 이아이디와 이화전기, 이트론의 상장폐지를 결정했으며 각 사의 이의신청으로 현재 재심의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이화그룹 상장 3사의 소액주주 수는 36만4756명이다. 행정구역상 하나의 시(市) 단위 인구수에 해당한다.

이들은 대부분 자녀의 결혼자금, 노후준비 등을 위해 투자한 소시민으로, 경영진의 비리에 전 재산을 잃게 생겼다. 이혼, 암 진단, 시한부 판정, 극단적 선택 등 일상이 파괴된 주주들의 소식도 들린다.

반면, <JTBC>의 보도에 따르면 김영준 전 회장은 지난해 12월 보석으로 풀려나 특급 호텔 회원제 피트니스센터와 회삿돈으로 매입한 고급 주택가에서 거주하며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

지난해 10월 22일 오후 1시 이화그룹 소액주주 연대가 여의도 한국거래소 앞에서 4차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이화그룹 소액주주연대)

이화그룹 상장 3사의 거래재개는 순탄치 않아 보인다.

<주주경제신문> 취재 결과 이화그룹 상장 3사 구성원으로 활동 중인 이아이디의 신정희 대표와 구본익 사내이사, 이트론의 주형진 사내이사는 지난해 한국거래소가 각 사에 통보한 상장폐지 사유서에 적시된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들은 아직도 이사회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어 거래소의 거래재개 결정에 영향을 줄 전망이다.

소액주주연대는 1대주주에 필적하는 지분을 모아 직접 거래재개를 위한 경영진 쇄신에 나섰지만, 회사 측은 주총 6주 전에 소집결의공시를 내 주주제안을 막으며 소액주주의 이사회 진출을 막았다.

이화그룹 최대주주(이화전기, 이아이디, 이트론)의 지분 매각 대상도 베일에 싸여있다. 이화그룹은 지난해 11월 순환출자 구조 해소를 위해 최대주주의 지분 전량 매각을 결의했다. 소액주주연대는 제대로 된 최대주주 유입을 위해 소액주주와의 협의체를 구성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횡령·배임으로 얼룩진 상장사는 비단 이화그룹만이 아니다. 지난해 유가증권시장에서는 백광산업과 한국앤컴퍼니, 한양증권, 한국항공우주, 세원이앤씨 등 굵직한 회사에서 횡령·배임 혐의 공시를 알렸으며, 코스닥시장에서도 광무와 초록뱀미디어, 비덴트, ES큐브, 지티지웰니스 등의 상장사의 횡령·배임 혐의가 밝혀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횡령·배임·분식 등에 대한 풍문·보도 조회공시는 유가증권시장 6건, 코스닥시장 81건으로 각각 전년대비 500.0%, 26.6% 증가했다.

사태의 근본 원인은 이사회에서 경영진의 횡령과 배임을 감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우리나라는 이사회 내 ‘사외이사’와 ‘감사위원회’를 두는 제도를 도입하여, 경영진에 대한 이사회의 감독 기능을 강화하려 했다.

상법은 상장회사의 경우 이사 총수의 4분의 1 이상을 사외이사로 하여야 하며, 최근 사업연도 말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회사의 경우 사외이사는 3명 이상으로 하되, 이사 총수의 과반수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사외이사 선임 시 독립성과 관련하여 결격사유에 해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정했다.

하지만 사외이사의 수만 확보하면 이사회의 독립성이 확보되는 것일까?

일부 전문가는 회사 내부사정을 경영진만큼 알기 어려운 사외이사라는 직책이 가지는 근본적 한계로, 애초에 사외이사 제도는 의도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삼일PwC 거버넌스센터에서 발간한 ‘2023 이사회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자산총액 2조원 미만 회사의 29.6%는 사외이사를 지원하는 전담부서가 없었다.

사외이사의 인적 네트워크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이사회 운영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주식회사 경영자들은 각종 감독기구 및 통제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횡령·배임죄, 뇌물죄(증뢰죄) 등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회사에 손실을 입히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한국거래소의 기계적이고 안일한 행정처리 시스템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한국거래소는 검찰이 김 전 회장과 경영진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다음 날인 지난해 5월 11일 이화그룹 상장 3사에 조회공시를 요구하며 거래정지에 나섰다.

하지만 한국거래소는 이화그룹이 횡령·배임 금액을 대폭 줄여 허위로 공시하자 별다른 확인 없이 지난해 5월 11~12일 이틀에 걸쳐 주식거래를 재개시켰다.

한국거래소는 검찰이 해당 사실을 직접 알려주기 전까지 허위공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래소의 미흡한 대처로 거래가 재개된 이틀간 이화그룹 3사의 거래대금은 6321억원이다. 피해가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거래소는 지난해 국감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당초 대체거래소 설립이 가능해지면서 ‘독점적 지위' 해소를 명분으로 2015년 공공기관에서 해제됐기 때문이다.

대주주와의 정보 불균형 문제도 드러났다.

이화전기 대주주였던 메리츠증권은 김 전 회장과 경영진의 구속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기 직전인 지난해 5월 4~10일 보유하고 있던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전량을 전환해 보유 주식 5848만2142주(32.22%)를 모두 장내 매도했다. 메리츠증권의 미공개중요정보 이용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이렇듯 현 제도는 경영진의 비도덕적 행위와 거래소의 기계적 행정에 소액주주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나름대로 신중하게 투자에 임했지만, 공시되는 내용들만으로 경영진의 문제를 개인투자자가 사전에 알기는 어렵다.

소액주주의 피해 구제도 어렵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에는 ‘이사의 의무 규정’ 등 기초적인 주주보호 제도가 부재하다.

국회에서 여러 의원이 다양한 상법개정안을 발의했지만, 번번이 계류된 채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되고 있다.

경영진의 횡령·배임 등으로 회사의 상장폐지가 결정되면 해당 주식은 7일간 정리매매 기간을 갖는다. 손해배상 소송을 통한 피해 구제는 어렵다.

소액주주 연대 플랫폼 헤이홀더 대표이자 변호사인 허권 대표는 “상장폐지가 된다고 해도 회사의 가치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주주들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유동성 상실’ 정도다. 경영진의 배임·횡령이 확정되면 손해배상 소송에 나설 수 있지만 회사에 실질적 손해를 따져야 하는 등 법리적으로 복잡하다”고 설명했다.

국내 개인투자자 수는 1400만 명을 넘어섰다. 대한민국 국민 3분의 1이 주식투자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증권시장은 이제 민생경제의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 기업의 기업지배구조는 도덕 및 윤리관념이 떨어지는 등 질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기업의 자율적인 변화의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깊다.

제도적 차원에서 강력한 내부통제시스템을 강제해야 한다.

이번 이화그룹 사태에서 드러난 이사회의 경영진 감시 등 내부통제시스템 불능, 한국거래소의 기계적 행정, 소액주주 구제 수단 부재 등의 문제를 개선한 상법 개정으로 추후 개인투자자의 억울한 피해를 막아야 한국 증권시장에서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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