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거부 상장사 자진상폐 속출...헐값에 쫓겨나는 주주들

올해 자진상폐 7곳 예정…역대 최대
오너家 주도 자진상폐는 BPS도 못 받아
한국ESG기준원 “정보 비대칭…시가 의존은 주주 보호 어려워”
업계 “제대로 된 회사만 상장되는 것도 의미 있어”

김나경 승인 2024.07.04 07:00 의견 0

올해 상장사들의 자진 상장폐지 수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밸류업 프로그램으로 인해 상장 부담이 커졌다는 게 이유다. 업계는 저평가된 주가만을 기준으로 주식매수·교환가격이 정해져 소수주주가 피해를 입는다면서도, 이후 증권시장에 밸류업 의지가 있는 상장사만 남는 순기능도 있다고 해석한다.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자발적 상장폐지를 위해 공개매수를 추진 한 기업은 유가증권시장 쌍용C&E, 락앤락, 신성통상과 코스닥시장 커넥트웨이브, 제이시스메디칼, 티엘아이, 대양제지다. 해당 기업이 모두 자진상폐에 성공하면 지난 9년간 연간 0~4곳에 불과했던 자진상폐기업은 올해 들어 7곳으로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올해 공개매수를 주도한 기업 가운데 절반 이상은 사모펀드(PE)다. 사모펀드들은 밸류업 부담 없이 투자금 회수(엑시트)를 순조롭게 하기 위해 자진상폐를 택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표적인 예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쌍용C&E의 최대주주인 한앤코다.

쌍용C&E는 오는 8일 상장폐지될 예정이다. 사모펀드 한앤코는 2016년 4월 이 회사의 최대주주에 올랐다. 지난해 쌍용C&E 순이익(2197억원)이 직전연도보다 71% 넘게 증가하자 올해 2월 공개매수를 진행하며 상장폐지 후 매각으로 엑시트에 나설 것을 예고했다.

김선미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약 8년간의 장기보유로 한앤코의 투자금 회수가 늦어졌다. 쌍용C&E의 대외적 환경과 주가 변동에 대한 노출을 최소화함으로써, 기업가치를 효율적으로 높이려는 목적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앤코는 주주들의 반발에 1분기 배당을 취소하고 불성실공시 벌점을 받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어차피 자진상폐 절차를 밟고 있어 벌점에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한앤코는 공개매수를 통해 쌍용C&E 지분 93%를 확보하며 자진상폐 요건을 채우지 못했다. 유가증권시장 상장규정은 자진상폐 신청 시 최대주주의 최소지분율을 95%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공개매수 실패는 상장폐지 진행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16년 개정상법이 시행되며 포괄적 주식교환 대가로 현금 지급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원래 이 법은 모회사가 자회사를 지분율 100%의 완전자회사로 만들기 위해 자회사 주주에게 모회사 주식을 주고 자회사 주식을 가져오도록 했던 것이다. 특별결의 사항으로 지분율 67%만 있으면 실행 가능하다.

여기서 모회사가 자회사 주식에 대한 대가로 모회사 주식 대신 현금을 지급할 수 있게 되면서, 사실상 모회사가 지분 67%만 있으면 자회사 주식을 강제매수할 수 있는 자회사 소액주주축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앤코 역시 포괄적 주식교환을 진행해 지분율 100%를 확보했다.

다른 사모펀드들도 비슷한 순서를 밟고 있다.

코스닥 상장사 커넥트웨이브 최대주주인 MBK파트너스는 공개매수를 통해 지분 81%를 확보했으며, 오는 9월 포괄적주식교환을 진행할 예정이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락앤락 최대주주인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는 공개매수를 통해 지분 86%를 확보했으며, 코스닥 상장사 제이시스메디칼 최대주주인 아키메드는 오는 22일까지 공개매수를 진행 중이다.

오너가가 자진 상장폐지를 주도하는 기업의 주주들은 주식의 장부 가치인 주당순자산(BPS)만큼도 받지 못할 위기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신성통상은 오는 22일까지 공개매수를 진행 중이다. 매수주체는 염태순 창업주 일가의 가족회사인 가나안이다. 매수가격은 주당 2300원으로 지난해 말 기준 BPS인 2950원에 미치지 못한다.

대양제지는 지난달 21일 코스닥 시장에서 상장폐지 됐다. 앞서 권혁홍 회장 일가가 최대주주로 있는 신대양제지는 지난해 12월 자회사 대양제지 주식 공개매수를 통해 지분 66%를 확보했다. 이후 대양제지는 올해 5월 임시주총에서 자신장장폐지를 결의하고 거래소에 상장폐지신청서를 제출했다.

신대양제지가 제시한 대양제지 주식 공개매수 가격 역시 지난해 말 기준 BPS인 5465원보다 21% 적은 4300원이다.

지배주주가 헐값에 소수주주의 주식을 강탈하는 행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송은해 한국ESG기준원 선임연구원은 “정보 비대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공개매수 가격과 시점을 결정할 권한은 기업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대주주 및 경영진에게 있으므로, 시장가격에 의존하는 방식은 일반주주들의 이익을 적절히 보호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반면 주가부양 의지가 없는 상장사는 자진상폐하는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입장도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밸류업 생각이 없는 회사는 자진상폐로 소수주주들을 엑시트 시켜주고 제대로 된 회사만 상장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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