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그룹의 경영 방향이 지배주주 일가의 경영권 분쟁으로 흔들림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지배주주 일가는 서로를 향한 맹공을 펼치면서도 경쟁적인 지분 매입은 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기관의 매도세가 겹치며 지주사 주가는 연초 대비 반토막이 났다. 일각에서는 지배주주 일가의 경영권 집착을 두고 기업 지배구조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선대 회장을 뛰어넘는 반세기를 열겠다"던 송영숙 한약품그룹 회장의 말이 무색한 지경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3일 한미사이언스 주식은 연초 최고가 대비 42.53% 하락한 3만2300원에 거래를 마감했다. 이 회사 주식은 지난 4월 이후 3만원 대를 횡보하고 있다. 같은 기간 한미약품 주가는 17.77% 떨어진 31만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배주주 내 소모적인 경영권 다툼에 투자자들은 피로감을 호소한다. 그룹 내 경영 노선이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으레 경영권 분쟁에서 호재로 꼽히는 경쟁적 매수도 없기 때문이다.
일부 주주는 네이버 종목토론방에서 “세계 최초의 입으로만 싸우는 지분경쟁”이라며 “좋은 뉴스는 하나도 없고 매일 싸움 뉴스만 난다”, “연기금이 매도하기 시작하니 주가가 폭락했다”고 토로했다.
대주주인 국민연금은 일부 지분을 매도하는 한편, 경영에 적극 개입하겠단 입장이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3일 기준 국민연금은 한미사이언스 지분 6.04%, 한미약품 지분 9.43%를 보유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에 맞춰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해 왔다. 지난 6월 한미약품 임시주주총회에서는 이사 선임 안건 4건 가운데 3건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반대한 이유로는 △임종윤 사장의 직전 임기 이사회 참석률이 75% 미만이었던 점 △신동국 기타비상무이사의 과도한 겸임 △남병호 사외이사의 회사와 이해관계로 독립성 훼손을 들었다.
반대했던 이사 후보가 선임되고 경영권 분쟁이 계속되자 올해에만 한미사이언스 지분 1.05%, 한미약품 지분 1.91%를 매도하기도 했다.
국민연금은 지난달 9일 한미약품 지분 보유 목적을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 변경하며 더욱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예고했다.
한미약품그룹 지배주주 일가는 고(故) 임성기 창업주 타계 후 지분 과반수를 보유한 절대적 대주주가 없어진 후 경영상 결정에 번번이 잡음을 내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020년 고(故) 임성기 창업주가 유언 없이 타계하자 부인인 송영숙 회장과 자녀 3명은 법정상속분에 따라 고(故) 임 창업주의 지분을 골고루 상속받았다. 상속 직후 지배주주 일가의 지분율은 송 회장 11.65%, 임종윤 사장 8.92%, 임주현 부회장 8.82%,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 8.41%였다.
지배주주 일가는 5400억원이 넘는 막대한 상속세를 마련하면서도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은 놓치지 않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지난 1월 송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은 OCI홀딩스에 지분을 매각해 한미약품그룹을 OCI홀딩스 중간 지주사에 편입시키는 방안을 내놓았다. 지분 매각으로 상속세를 마련하는 동시에 송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은 OCI홀딩스 1대 주주에 올라 한미약품그룹에 대한 간접지배를 이어가겠단 계획이었다.
통합안에서 소외된 임종윤·임종훈 사장은 3월 주주총회에서 한미약품그룹-OCI홀딩스 통합안을 반대하며 부결시켰으며, 임종훈 사장이 송영숙 회장과 함께 한미사이언스 공동대표에 오르며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된 듯 보였다.
하지만 지난 5월 송영숙 회장이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에서 내려오고 임종훈 사장이 단독 대표이사로 남으며 분쟁은 재점화됐다.
한미약품은 전문경영인체제를 내세우며 회사 내 인사팀과 법무팀을 지주사와 별도로 신설하고 ‘독자경영’을 선언했다.
이에 임종윤 사장은 직접 한미약품 대표를 맡겠다고 나섰다. 한미사이언스는 지난달 28일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를 전무로 강등하고, 지난 2일 임종윤 사장의 한미약품 대표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열었다.
다만, 해당 이사회는 임종윤 대표 선임안을 부결시키고 박재현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배주주 일가의 경영권 집착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는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의 고질적 문제라는 비판도 나온다.
지배주주 일가는 2500억원 규모의 잔여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지분 매각을 고려하면서도, 경영권은 넘기려 하지 않고 있어 투자 유치가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한미약품그룹은 지배주주가 경영권에 집착하고 있다”며 “경영권이라는 것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다. (경영권은) 대개 내 회사다라고 착각하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전문경영인으로 회사를 컨트롤하거나 하는 권리는 없다. 주주는 주주로서의 의무와 권리만 있는 것”이라며 “싸우기보다는 경영 능력을 보여주며 이사회와 주주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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